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소 다로 (문단 편집) === 집안 배경과 정치 행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아소다로젊은시절.jpg|width=100%]]}}} || || {{{#c3c965 '''청년 시절의 아소 다로'''}}} || 명문가 출신[* [[메이지 유신]] 삼걸인 [[오쿠보 도시미치]]의 현손이다.]으로, 친가는 재벌가, 외가와 처가는 정치 명문가이다. 증조부 아소 다키치가 1872년 규슈에서 탄광사업을 개시하여 1918년 아소상점으로 법인화[* 해당 법인은 1941년 아소광업을 거쳐 1954년 시멘트사업을 개시하여 '아소산업'으로 바꿨다가, 1966년 시멘트사업부문을 '아소시멘트(현 아소)'로 분리하고 1969년 청산되었다.]한 이래 재벌인 아소그룹[* 규모는 2021년 기준 102개 계열사에 연결매출 5,139억엔, 종업원 14,548명을 고용하는 기업집단이다. [[http://www.asoshoji.co.jp/recruit/about/group.html|출처]]]을 일궜다. 규슈에서 시작했고, 현재도 규슈에 본사가 있다. 아소 가문이 운영하던 아소 탄광은 일제 시절에 조선인을 [[강제징용]]해 [[전범기업|착취한 전적이 있어]] 문제가 되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4&oid=437&aid=0000204436|#]] 아소 다키치의 3남인 조부 아소 다로[* 이름이 같다. 3남이지만 첫째 형은 병약하고 둘째 형은 요절하여 아소가의 후계자가 되었다. 주식회사 아소상점 이사 역임.]와 카노 히사아키라(加納久朗) 자작[* 그의 아버지는 최후의 가즈사국 이치노미야번주였다.]의 여동생 나쓰코 사이에서 태어난 아버지 아소 다카키치(麻生太賀吉)는 아소광업 사장, 아소시멘트 사장, 규슈전력 회장, 중의원 3선의원, 일본석탄협회장을 역임했으며, [[요시다 시게루]]의 3녀 가즈코와 결혼하여 사이에 자식으로 아소 다로를 비롯해 3남 3녀를 두었다.[* 요시다 시게루가 마키노 노부아키 백작의 사위이고, 마키노 백작은 [[메이지 유신]] 삼걸, 일본 초대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의 아들이다. 따라서 아소의 친모 가즈코는 오쿠보의 증손녀가 되니 피가 이어지게 된다.] 아소 다카키치는 요시다 시게루를 돕기 위해 중의원 의원이 되어 정계와 재계 간의 연락선 역할을 했으나 요시다 내각 총사퇴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재계로 돌아왔다. 아소 다카키치와 가즈코의 3남 3녀 중 아소 다로는 장남으로 태어났다. 첫째 남동생 지로는 [[가쿠슈인대학]] 재학중 요트 사고로 22세에 요절, 둘째 남동생 아소 유타카는 현재 (주)아소 회장, 아소그룹 CEO를 맡고 있다. 여동생들은 모두 명문가에 시집갔는데, 첫째 여동생은 구 [[화족]] 자작가문인 소마(相馬) 가문의 33대 당주에게, 둘째 여동생은 주스페인 대사를 지낸 외교관에게 시집갔다. 셋째 여동생은 [[일본 황실|천황가]]에 시집갔는데, [[아키히토]] 덴노의 사촌동생 [[토모히토]] 친왕에게 시집간 [[노부코 비]][* 아소 다로와 15살 차이가 난다.]이다. 즉, [[아키코 공주]]와 [[요코 공주]]가 아소 다로의 조카이다. 한편 아소 다로는 [[스즈키 젠코]] 前 일본 총리의 딸과 결혼했다. 스즈키 총리가 총리대신에 재임중이던 1980년대 초, 당시 신진 의원이었던 아소가 스즈키 총리의 집에 갔다가 총리의 딸인 10살 연하의 치카코와 만나 1983년 결혼[* 둘 다 당시치고 [[만혼|결혼이 상당히 늦었다]].]하였다. [[화족]]의 후예인 [[재벌]]가 장남에 [[일본 황실|황실]]의 인척이며, 외가와 처가에는 전직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총리대신]]이 둘이나 있으니 혈연과 인맥이 엄청난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으나[* 일본 정치인들이 전통적인 상류층 출신이 많다곤 하나 실제로 화족/재벌급 집안 출신인 경우는 거의 없다. 화족들은 정치는 야쿠자들이나 하는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중의원]]이 실권을 쥐게 된 뒤로는 더욱 그랬을 법하가. 자작의 외증손인 아소 정도만 해도 전통 신분제 기준 최상위권이고, 아소보다 뚜렷하게 혈통이 우월한 경우는 '''[[코노에 후미마로]] 공작의 외손자'''이자 '''호소카와 후작가 장손'''인 [[호소카와 모리히로]] 정도뿐이다. 호소카와는 자기 동생이 현재 [[코노에]] 가문 당주이니 적통 중의 적통이다.], 그런 것 치고는 정치 역정이 순탄치 않았다. 1979년 중의원 초선, 1980년 재선에 성공하고 1982년 자민당 청년국장에 취임했는데, 1983년 스즈키 치카코와 결혼한 해에는 그런 지역 기반을 갖춘 정치인으로선 흔치 않게 낙선하여(5인 선거구에서 공산당 후보에 밀려 6등) 3년간 야인 생활을 했다. 첫 입각도 1996년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했는데 이미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2001년엔 [[누카가 후쿠시로]]의 후임 경제재정정책담당상에 취임했다. 그리고 2001년 4월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맞붙은 것을 시작으로 그는 자유민주당 총재선거에 4번을 출마했지만 첫 3번의 선거는 [[세이와 정책연구회]] 소속 의원에게 연달아 패배했다.[* 아소 다로는 이당시 군소 파벌의 영수였다.] 우선 2001년 총재선거에선 [[고이즈미 준이치로|고이즈미]], [[하시모토 류타로|하시모토]], [[가메이 시즈카|가메이]] 4명 중 3등을 했고, 이후 고이즈미 내각 및 총재 하에서 당 정무조사회장, 총무대신,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2006년 자유민주당 총재선거에 또 출마했으나 [[아베 신조]]에게 압도적으로 밀려 낙선한다. [[제1차 아베 신조 내각|아베 정권]] 하에서는 외무대신에 유임되었고, 동년 12월 새로이 파벌 [[지공회|위공회]]를 결성한다. [[제1차 아베 신조 개조내각|2007년 8월 개각]]시엔 자유민주당 간사장에 임명되었으나 곧 아베가 [[궤양성 대장염|건강 문제]]로 사퇴하고, 또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후쿠다 야스오]]에게 패한다. 2008년 8월 [[후쿠다 야스오 개조내각|개각으로]] 자민당 간사장에 재기용되었으나 후쿠다가 한 달만에 퇴진을 결정해 총재 선거가 치루어진다. 그리고 4수만에 드디어 당선되어 자유민주당 총재 겸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